[ 로봇의 일기장 ]


오두막의 양철 나무꾼,

유리의 에세이 게시판입니다.



"Now I can love"

said the tin man.







또 다른 로봇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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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나는 재작년 2월에 상담을 시작했다. 언젠가 상담을 하긴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2월은 대체로 의욕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시기니까 그냥 그정도의 마음으로 상담을 신청했다. 


그 전 해에 나는 좋아하던 친구에게 절교를 당했는데, 그 친구를 멀찍이서 보고 집에 돌아와서는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엉엉 울었다. 마치 헤어진 전 애인을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내가 그 사람을 아직 잊지 못한 걸 그제야 깨달아버린 것 같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이 든 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사실 캐나다로 오고나서 처음 들었던 마음들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뭐랄까, 처음 겪는 상황은 아닌데, 감정의 강도가 전혀 달랐다.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헤어졌는데도 왜 이렇게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고 차를 렌트해서 밤늦게까지 우버잇츠 배달이라도 하며 어디론가 운전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원래는 달리기를 열심히 하고 서너달쯤 지나면 좋아하던 사람도 대충 잊혀졌는데 이번엔 왜 몇달이 지나고 괜찮다가도, 새 여자친구를 스포츠카 옆자리에 앉히고 달리는 전남친 꿈을 꾸는건지. 절교한 친구를 멀리서 봤을 뿐인데도 커피 세잔은 먹은 것처럼 심장이 떨려서 잠을 잘 못자고 아침에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 '우리 얘기 좀 해'라는 문자를 찌질한 구애인처럼 보내야 하는건지, 그런 일들을 계속 겪고 나자 내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 마음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잔뜩 일어났고, 나는 아무것도 이해가 안 됐다. 


러닝하는 애플 워치 사진

원랜 뛰면 됐거든요? 이젠 안 됩니다



상담을 처음 시작하고 두어번인가 지났을 때, 상담사가 내가 좋아하던 친구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던 것과 좀 다른 해석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건 아닌데' 라고 생각하고, 어째서 상담사인데 말을 함부로 하는지 열받아하며 상담을 그만두었다. '다른 상담사를 찾아야지' 라고 생각했다. 두 어달 이후에 다시 그 상담사에게 돌아간 이유는 캐나다 의료시스템 상 단순히 새 상담사와 매치되기 위해 몇 주, 몇 달을 기다릴 에너지가 없어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누군가와 내가 생각이 다를 때 그걸 알려주고 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도 우리 상담의 큰 주제였으니까. 


누군가 나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었을 때 그것을 고쳐주는, 즉 내 의견을 정확히 표현하는 일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도 당시 나의 사고방식 중 하나였다. 나는 사람들을 변하지 않는 섬처럼 보는 경향이 있었다. 멀찍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있는 섬. 서로 크게 건드리지 않고, 힘든 일은 혼자서 해결해야하는 고립된 사람들의 세계. 다 해결하고 나면, 그 때 그런 일이 있었어. 너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그 때는 말하지 않았어 라고 하는 섬의 세계에 나는 살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이런 사고방식으로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 사람들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리스크가 큰 장사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고 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주면 사람들은 편해하고 좋아한다. 나도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편해하는 것을 큰 칭찬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 떨어진 두 섬끼리 섬 이상의 친밀한 관계가 되기는 조금 어렵다. 친밀한 관계에서는 감정이 얽히고 불편한 일이 생긴다. 상대가 내 바운더리를 건드리기도 하고 선한 의도로 상처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둘의 삶이 하나로 묶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고장이 났다. 상대를 변화시키면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상대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까지도. 


여기까진 내 바운더리니까, 넘어오지 말아주도록 해 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심이 작은 것, 사랑이 작은 것 혹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가 나에게 뭔가를 요청할 때에도 내가 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대를 덜 좋아한 경우 거만한 마음이 되어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상대를 좋아한 경우 내 상황을 설명하기보단 그가 원하는대로 내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속으로는 화가 너무나도 났다. 원래 피플 플리저*는 속에 화가 많다고 한다. 


*피플 플리저: People Pleaser. 타인의 만족과 승인을 얻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스름 내리지는 길거리를

맘 정리한다고 많이도 걸었다



나는 좋아하는 친구가 (내 짐작에)나에게 원했던대로, 나를 바꾸려고 했다(어휴 그놈의 짐작). 그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방법이었으니까. 대화로 서로의 의견을 알기보다 상대를 위해 내 욕구를 희생하고 포기했다. 욕구는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채우면 되니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사과하면 지는 것 같았고, 애정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더 쉽고, 사랑은 덜 할수록 좋은 장사라고 생각했다. 원래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일은 아무리 순한 사람이라도 화가 나는 법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이런 권력과 계산 없는 친밀함과 다정함을 갈구했다. 애초에 그 친구를 그렇게 좋아했던 이유는 내가 약한 모습이나 쿨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을 때 그 부분을 장난삼아 놀리지 않고, 진심으로 아파하고 따뜻하게 도와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세계가 있는 줄도 몰랐다. 캐나다에 오기 전까지는 아마 필요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영 새로운 나라에 오기 전까지의 나는 어려운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단단한 성채를 잘 만들어놨었기 때문에. 좋은 직장, 좋은 친구들, 가족과의 적절한 거리, 고양이. 그것들은 나를 잘 지켜주었고, 잘 작동했다. 모종의 이유로 캐나다에 와야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 


나의 예전 방식은 그냥, 어느 순간부터 작동하지 않았다. 왠지는 모르겠다. 수많은 스스로의 거짓말이 얽히고 설켜 더 이상 하나로 통합될 수 없는 순간이 되어 고장나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재건축의 접근방식은 심플해야 했다.


나는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싶은가? 만들고 싶다. 그러면 방식을 바꿔야 했다. 내가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했으며, 상대에게 내 불편을 표현하는 방식, 날 위해 뭔가 바꿔주기를 요청하는 방식을 아예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4월에 다시 돌아간 상담사에게 나는 정확히 저 단어들을 사용해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때는 내가 겪고있는 게 무엇인지 설명할 단어조차 없었다.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거기서 편하고 싶어요."




그걸 위해 사고방식을 뜯어고치는 일은 무척 지난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에 대해 충격적인 사실들을 많이 배웠다. 내가 뭔가를 하고 있지 않을 땐 스스로를 멋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감정을 아주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 좋은 성취를 거뒀을 때만 스스로 존중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는 것, 불안이 그동안 나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동력원이었다는 것, 나는 마음이 긴장되고 불편한 상태를 익숙해서 좋아한다는 것,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인정을 갈구한다는 것.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도대체 이 웃기는 사람은 누구야?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나씩 정리해서 풀어가볼까 한다. 감정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도 '느껴보지' 못했던 사람이 스스로의 감정을 하나씩 공부하며, 마음과 감정의 세계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 같다. 





사고방식 뜯어고치는 중 (공사중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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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에게 물었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떻게 해요? 그냥 소파에 슬퍼하면서 앉아있어요? 상담사는 '그냥 슬프다는 것을 인정세요' 라고 했다. '인정' 하라고? 난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감정에 대해 어떤 acting을 할지 묻는다. 안 슬프려면 뭘 해야해요? 혹은 반대로도, 슬프려면 뭘 해야해요? 정답은 굳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감정은 감정이고, 행동은 행동이니까. 모든 감정에 대해 행동을 해야 되는건 아니니까. 그래도 나는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 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잘 느껴지질 않아서, 여러 사람에게 계속 묻는다.


잘 슬퍼하는 친구들에게, 슬프면 뭘 하는지 묻고 다녔다. 한 친구는 계속 그냥 울면서 있는다고 했다. 슬픈 생각이 들면 하고. 그냥 그런다고. 너무 신선하군. 이게 영원할까봐, 나를 집어삼킬까봐 무섭지가 않단말이야? 친구는 너무 너무 슬퍼서 다른 마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냥 폭포처럼 쏟아지는 슬픔을 그대로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구나. 어쩌면 나는 감정을 한번에 프로세싱할 수 있는 메모리의 용량이 너무 적은 건 아닐까? 그래서 감정이 100 만큼 있으면, 그걸 10씩 10일씩 슬퍼하면 될 것을, 1씩 소화해야해서 100일이 걸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1씩도 하고 싶지 않아서 0.1만큼만 소화하니까 1000일이 걸렸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1000일 조차도 하고 싶지 않았어서, 아직도 소화 못한 10년 전의 슬픔이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너무 많은 슬픔이 저장되어 있을까봐 슬픈 노래 하나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슬퍼하려고 해도, 몸에 밴듯 자연스럽게 그 슬픔을 피하는 나를 발견한다. 슬픈 노래가 나오려 하면 앗차, 하고 빠르게 다음 곡으로 넘긴다. 오늘은 아냐. 상담사가 슬퍼하기를 해보라고 해서 요즘 나는 슬퍼해야지! 가 인생 당면 과제인데도 정신 차려보면 딴 짓을 하며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혹시나? 하고 어딘가에 가만히 누우면 눈물이 팍 하고 난다. 그러면 아 나 슬퍼서 또 스스로 바쁘게 만들고 있었구나 하고 그제서야 깨닫는다.


요즘은 그래서 뭘 항상 '하고자' 하는 나답게 '아 그냥 올해 1년 내내 슬퍼해야겠다' 고 정해봤다. 이렇게 각을 잡고 슬퍼하기를 연습하면 언젠가 슬픔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슬프면, 그냥 울고,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서 흑흑 울고, 또 소리내서 울기. 슬픈 생각이 들면 계속 슬픈 생각을 하기.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다. 슬픔에는 슬픔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슬픔의 효능을 정리해봤다. 한국인은 효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슬픔의 효능


  1. 릴렉싱에 도움이 된다. 부교감신경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울고나면 몸과 마음이 가뿐하다. 한마디로 건강에 좋다!
  2. 솔직한 사람이 된다. 슬픔이란 감정이 있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고, 또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나다워질 수 있는 기회이다.
  3. 부모에게 반항할 수 있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슬프지 말라고 했음. 그럼 난 더 슬퍼할거야! 어릴 때 못 슬퍼했던 만큼! 울고 떼쓸 기회! 우는 애에는 떡 하나 더 먹을 수 있는 기회가! 
  4.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으며 몸,마음,정서적인 에너지 보존을 할 수 있다.




슬퍼하는 법도 정리해봤다.


  • 몸이 바쁘게 뭔가를 하고 있을 때 하던 것을 멈추고 누워서 가만히 있는다. (그러면 눈물이 팍 날 때가 많다. 슬프면 뭔가 행동을 하면서 슬픔을 외면하는 게 습관이므로,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을 몸에게 줘봐야 한다. 누워야 한다.)
  • 슬픈 생각이 들면 왜 내 마음이 이 마음을 자꾸 꺼내는지 생각해본다. 이게 나의 무슨 욕망과 기대를 채워주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슬프고 싶은 일을 내가 계속 외면하고 있는가? 연락받고 싶은 사람에게 연락을 못 받고 있는가? 너무 힘들어서 에너지가 없어 쉬어야 되는데도 자꾸 억지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가? 그런 내면의 기대들을 생각해보고, 그럴수 있다고 스스로 인정해준다.

   누우면 그동안 외면한 감정들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까 슬플 수 있는 건 어떻게 보면 좀 멋진 일인 것도 같다. 난 내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슬퍼할거야! 대신 사람마다 감정 메모리는 다양할 수 있으니까, 작은 사이즈인 경우 한 번에 많이 아파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씩 계속 자주 해도 된다. (일단 나의 감정 메모리는 엄청 작은 사이즈인 것 같다.)


또 어떤 감정이 있다고 해서, 꼭 그 감정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면 도움이 된다. 슬퍼도, 꼭 슬픔을 털어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뭔가를 '주지 않는 것'도 사랑의 건강한 표현이다. Holding accountability 할 수 있도록, 혼자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사랑의 일종이다. 마음은 지금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도 조금이라도 보여줬다면, 진심을 다했다면 언젠가는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전달하는 사람 뿐아니라 전달받는 사람의 몫도 있다.


마음과 감정의 세계에서 제 1원칙은 '감정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이다. 이 세계에서는 기쁨도 절망도 온전히 1의 몫을 가진다. 제 2원칙은, '지금 느끼지 않으면 몸 어딘가에 쌓인다' 이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감정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곳에서 분출된다. 괜히 괜찮은 사람에게 질투섞인 말을 하게 되거나, 아침에 갑자기 일어나서 회사에 가지 못하게 되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발진이 생기거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감정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 지 알기.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너무 언쿨하고 찌질해도 그냥 그대로 인정하기.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냥,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완전히 찌질한 나를 인정해야, 또 어느 순간 억한 심정 없이 성숙하고 쿨한 나도 될 수 있다. 이것이 감정과 마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이다.



* Holding accountability : 책임을 다하다

* 편집자의 덧붙임: 유리는 글 중간 중간에 툭 튀어나온 영단어를 한국어로 고치려 했지만, 오히려 툭 튀어나온 단어가 유리답게 느껴져서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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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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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도 너무 좋아요. 다만 초반의 빌드업이 차곡차곡 쌓이면 훨씬 보석처럼 빛날 거예요. 중간~마지막 문단이 걍.. 마음을 팍팍 치는 어퍼컷이기 때문입니다.


상담을 하면서 내가 슬픔이나 화 등 부정적인 감정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부정적인 감정에 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아예 슬픔을 테마로 잡은 캠핑을 다녀왔다.


(독자 입장에서는 슬픔 캠프를 가게 된 배경 설명이 궁금할 것 같아요. 1, 2편을 읽고 3편을 읽는 독자라면, 이 사람... 깊은 생각을 가졌구나. 평범하지 않구나. 그럼 이 사람은 어떤 생각 과정을 거쳐서 굳이 '슬픔' 캠프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걸까? 가 매우 궁금할 테니까요)


캠핑 떠나는 날 아침은 애니어그램 스터디를 한 날이었다.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여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는데, 거기서 명상 모임을 주최했다가 어쩌다보니 한 친구의 제안으로 애니어그램 스터디를 하게 된 지 몇 주 되었다. 애니어그램은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반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성격 체계인데, 기대하지 않았었지만 내 기준에선 MBTI보다 훨씬 정확하게 나를 설명해준다고 느꼈다. MBTI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반면, 애니어그램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에니어그램 이야기를 넣고 싶다면, 에니어그램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이것을 스터디하게 된 계기도 이야기해주면 독자도 같이 빠져들 것 같아요. 고착 설명이나, 유리님의 번호 이야기나, 독자에게 에니어그램을 살짝 맛보여주는 파트가 되어도 좋아요. 저를 영업했던 마음처럼! 유리님은 영업도 잘하고 설명을 쉽고 재미있게 하니까요.) 


나는 7번 타입인데, 그 타입의 핵심은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움은, 고통, 그것도 내면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외부에서 끊임없이 행복과 기쁨을 바쁘게 추구하는 것이다. 애니어그램의 핵심감정은 힘이 아주 세서, 다른 어떤 것들을 하다가도 결국에는 이 감정으로 자연스레 돌아오게 된다. 예를 들어 기쁨을 추구하는 나의 핵심 감정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도 농담거리 삼아 나와 남들을 웃게 하고 싶도록 한다. 평생을 외로움과 씨름하던 나는, 7번 타입이 나를 정확히 설명해준다고 느꼈다. (스터디에서 어떤 과정으로 자신의 핵심을 깨달았는지도 궁금해져요. 유리님의 글을 읽다보면 독자도 깨닫고 싶어할 것 같아요. 어떻게 깨달으셨는데요..? 하고요.) 


그 날 아침의 스터디에서 들은 말은, 각 타입마다 장점이 있고, 그래서 그 타입의 궁극적인 두려움을 피하거나 혹은 거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 공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때,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예를 들어, 나는 그래서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너무나 피하고 싶어하고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나니까, 너무 다행이었다. 슬픔을 마구 내보이고 슬퍼해도 이게 영원히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걸 아니까, 안심되고 안도되었다. 일종의 슬퍼할 자유를 얻은 느낌도 들었다.


(이를 테면 7번이 갖는 고착과 슬픔에 대하여!) 내가 슬픔이 무서웠던 이유는, 슬픔이 내 머리채를 틀어쥐고 집어삼켜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잠깐만 머물다 가는 손님이 아니라, 내가 약해진 찰나의 순간에 나를 먹어버리고 내 영혼의 주인이 되어버릴 것 같기 때문에. 슬픔에게 자리를 내어주면 영원히 안 떠나고 나를 독재자처럼 다스릴 것 같고 쓰나미처럼 삼켜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 쪽은 쳐다보지 않고 딴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바쁘게 만든다. 나는 슬퍼해야 할 때가 오면 많이 움직여서 지쳐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러면 바로 쓰러져서 잘 수 있으니까. 슬픔과 같이 비생산적이고 괴로운 감정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좀더 '생산적'인 것을 할 수 있으니까.


캠핑 마지막날, 너무 일찍 일어나서 시간이 남았다. 친구들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나는 샤워를 하고 텐트를 접고 모든걸 하며 스스로를 바쁘게 했는데도 더 이상 할일이 없었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다. 그래서 해먹에 누워봤다. 누웠더니 미뤄놨던 슬픔이 팍 하고 밀려웠다. 해먹에 누워서 내 마음의 지도를 상상해봤다. 내 마음속에는 내가 왕인 마을이 있는데, 그 구석에 사는 슬픔이의 집은 작고 낡았다. 나는 그를 일종의 불가촉천민처럼 대해왔다. 저기 가까이 가는 사람은 다 미워할거야!라고 엄포를 놓아서 그 집에 들고 나는 사람도 많이 없었다. 하지만 때때로 나도 종종 찾아가야만 할 때가 있었다. 슬픔이 말고는 나를 이해해줄 사람이 없어서. 나는 밤에 몰래 찾아갔다.


슬픔이의 옆집에는 기쁨이가 산다. 그는 크고 멋진 성에 산다. 빨간색으로 속속들이 칠해진, 멋지고 과시적으로 지어진 성이다. 자주 파티가 열리고, 손님이 잔뜩 드나든다. 슬픔이는 옆집에서 자주 그것을 보지만 딱히 그것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냥 그의 삶을 산다. 대체로 볕이 드는 부엌을 닦고 쓴다. 집을 청소하고, 얼마되지 않는 세간살이를 정돈하고 있다. 그의 집은 좁고 낡았지만 햇볕이 잘 들고, 먼지가 별로 없다. 슬픔이는 자기 집을 좋은 상태로 조용히 유지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날이 좋으면 마당에 앉아서 볕을 보는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그게 재미없고 심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의 집에 찾아오는 친구는 많지 않지만,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진짜 마음을 들고 온다. 그는 그것에 대해 감사한다.


기쁨이의 집은 무척 크지만, 이것이 그가 항상 원했던 것은 아닌것 같다. 그는 불안이와 시간을 자주 같이 보낸다. 기쁨과 불안이 항상 같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닌데, 내 마음의 지도에서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실은 불안이가 옆에서 부추겨서 기쁨이의 집이 자꾸 증축된 것 같다. 이렇게까지 붉을 필요도 없었는데 어느순간 이렇게 붉고 큰 성이 되었다. 손님은 자꾸 드나들고, 파티 계획은 점점 더 매 주말을 그리고 때로는 쉴 시간을 침범해가며 주중을 채웠다. 기쁨이는 가끔 불안이가 없을 때면 성의 테라스에 앉아서, 자신의 집도 이렇게 우락부락한 성이 될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꾸 불안이가 드나들고 이런 저런 것들을 하게 만든다. 그 테라스에서는 슬픔이네 집이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기쁨이는 종종 그 집을 쳐다본다. 슬픔이는 자신을 쳐다볼 때도 있고, 그럴 때는 꼭 손을 흔들어준다. 예전에는 화들짝 놀랐지만 요즘은 조금 친하게 지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불안이는 기쁨이가 슬픔이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둘이 가까이 지내면 '사람들이' 기쁨을 좋아하지 않거나, 혹은 '성공'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해먹에 앉아서 울었다. 습관처럼 소리를 죽이고 울고 있길래, 그냥 소리를 흑흑 내며 울어보았다. 슬픔이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홀대를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원한다면 더 큰 땅을 주겠다고 가지라고 했는데, 그는 조용히 거절하며 필요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까 더 울고 싶어졌다. 슬픔이는 큰 땅이 필요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내가 무서워서 항상 그를 홀대했고, 그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마을에서, 홀로 만들어낸 두려움에 가득찬 잔인한 왕이었던 것 같다. 



슬픔에게 조금은 공간을 내어줘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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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 그런 순간이 있었다. 5시간 정도 멈추지 않고 유투브를 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토크쇼 클립들이었는데, 재미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쭉 듣다보니 어느새 밤 11시가 되었다. 그리고 티비를 멈추었는데 정적이 밀려왔다.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마음이 시끄러웠다. 목소리들이 들렸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니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조곤조곤하게 울렸다. 흥미롭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들을 들었다. 평소에 이런 생각들이 눌려져 있었단 말이야? 내가 이런 생각들을 품고 있었단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자신에게 잔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그건 나와는 먼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얼마전에 이별한 전 애인과(성별이 화두가 되지 않을 만한, 적합한 단어가 있을까요? 있다면 수정 요망! 이 에세이는 유리님과 그의 개인적 관계인데 이 글을 읽는 첫독자는 대부분 트위터에서 오고, 이 이후의 폭언이 다소 충격이라 사람들이 유리님의 글을 '개인적 관계'가 아닌 성별 때문에 벌어진.. '사회 정치적 관점'에서 보기 시작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도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음!) >> 더하는 말 : 이 건 되게 의미있는 피드백이라는 생각을 했음. 왜냐면 제가 캐나다에 오고난 이후에 한국에 계속 남아있는 친구들과 이 지점에서 꽤 멀어졌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남성들이 가지는 특권이 더 약한 문화권에 오니, 남자가 확실히 감정을 가진것이 느껴지고 '인간'에 가까워지니까 저의 남혐도 꽤 옅어져서, 이제 한국 여자 사람 친구들이 남자에 대해 가지는 반감을 이해하기가 꽤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단어는 '애인'으로 수정했습니다. + 그와 동시에, 이 정도의 말은 저는 폭언이라는 생각은 안했는데.. 이건 제 폭력감지 레이더가 약해서라기보다는, 저는 역시 좀 잔인해도 진실에 가까운 말들을 하고 듣고 지내는걸 선호해서 그런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게 아마 다은님이 저에게 '무섭다' 고 할 때 느껴지는 느낌과 비슷한 것일까요? 아마 앞으로도 그것 vs 트위터 대중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목적 2개가 부딪힐 때가 있다면 저는 전자를 선호하고 싶어요. 그냥 이 대화를 한번 시작해보고 싶었어요. 꽤 잔인한 말싸움을 자주 했다. 내가 그 사람에게 퍼부은 말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지 않아도 될,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한 것을 날카롭게 단련한 칼날같은 말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왜 그런 말들을 해야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 사람이 더 좋은 삶을 살기를 바랐고, 내가 원하는 것과 비슷한 삶의 관점을 공유했으면 했고, 비슷한 결의 삶을 살기를 바랐다. 자기 자신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말들을 해주면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비슷한 종류의 말을 나에게 퍼부었다. '너는 너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니 인생은 길을 잃었고, 넌 하고 싶은 게 없어서 지금 나를 붙잡고 괴롭히고 있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쿵 하고 가라앉았고, '들켰다' 혹은 '보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너를 사랑해'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후 무서움으로 쿵쿵대는 심장을 안고 잠들려고 노력하는 동안 어딘지 모르는 한 켠에서 안도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내가 가장 스스로에게서 별로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들켜도, 이 사람은 나를 떠나지 않는구나. 그 점이 못견디게 안심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고난이도의 가스라이팅은 아닌가, 악마와의 거래가 이런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점을 나는 보았어. 그리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너를 사랑해. 이런 나를 너는 떠날 수 있을까?' 라는 종류의 거래. 


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다. 프로그래밍을 하면 여러 개념들을 배운다. 어떤 개념들은 철학적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개념은 void다. '공허' 또는 '공' 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아무 값도 반환하지 않는 함수를 정의할 때 자주 사용된다. 나는 void의 정 반대편에 있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거나, 혹은 계획하고 있다. 밥을 먹으면서 다음 메뉴를 계획한다. 언젠가 적절한 때가 오면, 적절한 공간에 가면 항상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도록 머리속에는 쪽지식과 레퍼런스들을 우겨넣는다. 그런 나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이를테면 모든 종류의 빈 공간이었던 것 같다. 아무 스케줄도 없는 일요일, 성장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직장, 재미있는 것을 다 봐버린 유투브나 넷플릭스 화면, 문제거리가 없어 머리를 풀 가동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 새롭게 하고싶은 것이 없는 나날들. 빈 공간에 남겨진 나. 빈 시간 속에 있는 나. 욕망이 없는 나. 


그러나 빈 공간 자체가 무서운 것일까 아니면 빈 공간에 있을 때만 떠오르는 감정들이 두려운 것일까? ‘이럴 때가 아닌데’ 라는 불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슬픔. 충분히 노력하고 있지 않다는 자책감. 요즘은 기차와 비행기에서도 인터넷이 되는 탓에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 이전에 나는 어딘가 이동하는 교통수단에 앉아있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허락된 빈 공간’ 이었다. 학교에 정전이 되어서 조퇴를 해야만 하는 그 순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상관있는 것은 항상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슬픔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부모님이 원했던 만큼 성취해야 한다’는 내 오래된 목소리들이거나, 혹은 그 목소리들이 빚어낸 오래된 마음의 습관일 뿐이다.


무언가를 원하지 않으면 나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나는 누구인가? 아무것도 머릿속으로 계획하지 않을 때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무것도 원하고 계획하지 않아도 존재하는가? 아무것도 읽지 않는 나는 가능한가? 지금 이 상태에 머무르며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 나는 가능한가? 그리고 이 질문들이 이제서야 떠오른 이유는 내가 놀랍게도 여태까지 나에게 진정한 의미의 빈 공간을 줘본적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근에 명상과 요가를 시작했는데,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서야 시작한 이유는 혼자 집에 남겨져 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문제가 이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더 미루다가는 길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 같아서, 배수진을 치고서야 시작하게 되었다. 이유가 뭐였던지 간에 명상은 나 자신의 깊은 감정들에 닿게끔 도움이 된다. 그것들은 오래 쳐다보지 않았는데도 놀랄만큼 명확하고, 또 단순하다.


나를 계속해서 행동하게 하는 궁극의 두려움은 이것이다.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무섭다. 예전 상담선생님이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선생님,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나죠. 그건 너무, 너무 무서운 일이에요. 공허는 저에게 질문을 한단 말이에요. 너는 누구야?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너는 누구야? 너는 존재해? 백조가 물속에서 끊임없이 발을 휘젓듯이 나는 존재라는 물 위에 떠있기 위해, 그 질문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발을 휘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이거 누군지 안다. 우리 엄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도 문득 기억해냈다.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은 곁에 있는 사람들을 외롭게 한다. 


가끔, 엄마, 내 말을 듣고 있어? 엄마, 지금 어디에 있어? 라고 내 옆에 앉은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항상 다음 일을 계획하던 엄마는 가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뭔가를 하느라,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기엔 너무 바빴다. 그건 어린 나에게도 느껴졌다. 엄마의 계획들은 빈틈 없었다. 치과를 가야 한다, 시험 준비는 잘 되고 있느냐 이런 대화 대신, 나는 그저 엄마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 엄마의 속상한 마음, 부끄러웠던 마음, 무서웠던 마음, 짱 기뻤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은 대체로 튕겨져 나왔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정언명령들로 방향을 선회했고, 나의 감정들은 연결되지 못한 채 촉수를 축 늘어뜨리다 뻗는 힘을 잃었고 나중에는 있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을 외롭게 했을까. 나도 그러고 싶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냥 다르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배우지 못했을 뿐이었는데. 


우리집에는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서 혼자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살기 위해서는 고양이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고양이가 이유도 없이 야옹거리거나, 뭔가를 떨어뜨릴 때 괴로워하지만 그런 문제들이 없었다면 나는 더 괴로웠을 것이다. 나는 대체로 아침에 일어나면 먹고 싶은 것이 머리에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것이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편안한 무드에서 노을 빛을 받는 봉봉이 사진이 있나요? 멀뚱하게 유리님을 쳐다보는 사진이라던가. 이쯤에 사진 있으면 사람들 환장할 것 같음!





빈 공간을 주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독서모임도, 요가수련도, 책읽기도, 커피챗도, 낮잠도, 산책도, 상담도, 잡 서칭도, 직장 지원도, 게임도, 음악듣기도, 데이팅앱도, 카톡 채팅도, 기다림도, 데이트도, 사랑도, 빨래도, 설거지도, 바닥청소도, 흡연도, 가드닝도, 캠핑도 하지 않으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미래를 계획하지 않았던 적이 없고, 뭔가를 욕망하지 않았던 적이 없고, 뭔가를 하고 있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지 않아본 적이 없다. 그냥, 존재해본 적이 없다. 질문이 떠오르게 내버려두고, 두려워해보게끔 허락해 준 적이 없다. 모든 파도가 가라앉고 나면 가장 밑에 가라앉아있는 상자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이것에 대한 호기심이 공포에도 불구하고 나를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아무것도 반환하지 않는 함수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 




사랑을 하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난

오즈의 마법사 양철 나무꾼을 아시나요? 


인생에서 가장 멋진 것은

사랑이고 열정이라는데,


오랫동안 그걸 가질 수 없었던 유리는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도피처가 되어주던 책에서 배운 건 

이제 예전의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남의 마음을 마법처럼 읽어내기보다

무서워도 눈을 맞추고 물어보기,


나에게도 남에게도 빠르게 말고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충분히 주기,


남에게 친절했던 만큼

나에게도 친절하기.





누구에게나 마음을 닫아야만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시절이 있지요.

현재 유리는 닫아둔 마음 상자를 조금씩 열어가며,

캐나다에서 상담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태껏 닫아두었던

유리의 감정 채널이 열리자

여태까지와는 다른 노랫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양철 나무꾼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노래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유리의 글이 또 다른 양철 나무꾼에게

닿기를 바라며 오두막 한 켠에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마음이 허할 때,

약처럼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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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유리는 오두막의 사주 이야기를 익히고,

캐나다에서 게슈탈트 상담 기법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 게슈탈트 상담 기법은 현재 '지금, 여기'에서의 경험과 감정을 '알아차림'으로써 통합적이고 성장하는 전체를 만들어가는 데 초점을 둡니다.

내담자는 자신의 신체 감각, 욕구, 감정, 행동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고 책임지며 미해결된 과거의 과제를 현재로 불러와 해결함으로써 적응적인 게슈탈트(전체)를 완성하도록 돕습니다.



유리와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을 때는 이곳을 두드려주세요.


아직 준비 중이지만,

여력이 생기는대로 유리의 상담소를 오픈하겠습니다.


뾰로롱